영국의 지리학자 제이 애플턴은 서식지 이론에 관해 이른바 전망과 도피 이론을 제안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좋은 서식지는 일단 높아야 한다. 멀리 내다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먹을 것이 어디 있는지 쉽게 찾고, 물론 짝도 찾는다. 또한 숲이 울창하거나 산과 언덕 등으로 잘 가려져 있어야 한다. 물도 적당히 흘러야 한다.
위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는 진화적 본능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생존 본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높은 곳에서는 주변 상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고, 잠재적 위험을 빨리 발견하여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위가 세로토닌 수치를 증가시킨다고도 하는데 이는 진화적 본능에서 오는 안전감이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다는 주장, 그리고 높은 곳에선 햇빛에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햇빛은 세로토닌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 D의 합성을 촉진해 세로토닌 수치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서 오는 심리적 통제감과 우월감이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하여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킨다는 주장도 있다.
인간으로 서의 진화적 본능, 통제감과 우월감, 그리고 세로토닌의 증가 중 그 어떤 사실이 나를 가장 강력하게 높은 곳으로 이끄는 원동력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찰나의 아찔함도 있지만 가로막힌 것 없이 탁 트인 하늘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는 행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감동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여행을 가서도 항상 전망대 등 높은 곳은 어떻게든 찾아서 가보곤 하는데 뉴욕에서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뉴욕에서 찾아갈 수 있는 전망대의 옵션에는 꽤 여러 개가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탑오브더락),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엣지 전망대, 써밋 원 밸더빌트 등. 각각의 고유한 특징과 뷰가 있어 기회가 된다면 모두 방문해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한 개만 골라야 했다. 꼭 하나만 가야한다면 트렌디 보단 클래식을 선택하고 싶어 탑오브더락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는데, 오랜시간의 검증을 거쳐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낸 클래식이 더 베스트(the best) 라는 나의 주관이 작용한 결과다.
탑오브더락은 영화 <나홀로집에>에 나오는 아이스링크장으로도 유명한 록펠러센터에 위치해 있다. 전망대는 총 3개의 층(67층, 69층, 70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유리 장벽이 없는 70층 전망대의 파노라마 뷰가 압권이다. 나는 70층에서 겁도 없는 어린 아이처럼 동, 서, 남, 북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내 아래 펼쳐진 뉴욕을 눈에 담기 바빴다. 한 눈에 담기는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 뒤로 보이는 할렘 지역, 저 멀리 보이는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자유의 여신상, 맨해튼을 감싸고 있는 허드슨 강 그리고 코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영화 <하늘의 걷는 남자>의 조셉 고든 레빗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 사이를 단 하나의 줄로 걸었듯, 나도 하늘 위를 걸어 록펠러센터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까지 갈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문득 궁금해졌다.

거침없이 펼쳐진 세상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광활함과 해방감에 한껏 고양되는 한편, 한없이 작고 초라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무한히 넓은 이 세계와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저 작은 존재인 내가 극명히 대비되는 순간이랄까. 난간에 턱을 괴고 내 눈앞에 펼쳐진 뉴욕을 보며 생각했다. 나라는 개인 하나는 이 드넓은 세계의 먼지 티끌도 되지 않는데, 나 하나 없어도 이 세상은 무심하게도 잘만 돌아갈 텐데, 굳이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상처받으며 사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가. 내가 꿈꾸는 이상은 결국 이 넓은 세계 속 그 어떤 것도, 그 아무것도 아닌 허상일까.
이런 말도 안되는 높이에서 마주한 광대한 뉴욕은 나에게 여러가지 복잡미묘한 감정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끌의 티끌도 안되는 매우 작은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런 나란 존재를 과감히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 큰 품 안에 잠시나마 작은 나를 품어주고 환대해 준 뉴욕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앞으로도 나는 그 어떤 도시로 여행을 가든 높은 곳을 찾아 계속해서 올라갈 것 같다. 그리고는 그 광활함에 압도됨과 동시에 또 한 번 나의 아무것도 아님에 잠시 위축되겠지만 어차피 보통 사람이란 그런 존재요,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임을 인정하게 되면 사실 크게 별일은 아니게 된다. 그저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눈에 담기는 이 세계를 온전히 즐기고 난 뒤에 나는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든 말든 다시 내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내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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