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여사는 예전부터 주기적으로 때를 밀었다. 때를 미는 주된 이유는 밀고 나면 속이 후련해서 이고, 밀지 않으면 말그대로 몸에 때가 낀 느낌이라 했다. 어린 시절 방안에 있으면 욕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이여사의 소리가 들렸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내 이름을 들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고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마치 수술을 위해 손에 하얀 라텍스 장갑을 끼는 의사와도 같은 모습으로, 고사리 같은 손에 초록색 세신 타월을 비장하게 끼고서는 열심히 그녀의 등짝을 밀어주곤 했다.
때밀이에 진심인 이여사는 본인 몸의 때만 밀지 않았다. 그녀의 미니미인 나의 때도 열심히 밀어주었다. 그녀는 어린 나를 욕조에 반강제로 담궈 놓고 때가 불때까지 기다리다, 활어 건지듯 욕조에서 건져내어 내 몸의 때를 밀어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여사와 달리 때를 미는 게 싫었다. 아프기만 한 것 같고, 도통 이여사가 말하는 ‘시원함’의 의미를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여사에게 때를 밀기 싫다고 꽤나 저항했던 것 같다. 점점 성장해 가는 내 몸에 따라 그녀가 밀어야 하는 면적도 커져버린 이유였을까, 자연스레 이여사는 더 이상 저항하는 나를 강제로 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때를 미는 행위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그렇게 때밀이를 잊고 산지 어언 20여년, 욕실에 못보던 아이템이 불쑥 등장했다. 이는 바로 바디 필링 제품. 이는 젤 형태로 되어 있는데, 손에 짜서 몸에 문지르면 손쉽게 각질이 떨어져 나온다. 예전처럼 몸을 탕 속에 담궈야 할 필요도 없고, 힘을 주어 때 타월로 박박 밀 필요도 없어졌다. 이 제품은 이여사의 필수템으로 곧 자리잡았고, 얼마전에는 홈쇼핑에 싸게 나온 것을 기뻐하며 대량 구매 후 나에게도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이여사의 권유 대로 나는 온 몸에 필링젤을 바르고 문질러 본다. 스믈스믈 각질들이 떨어진다. 초딩시절 욕조에서 뛰쳐나올 순간만을 기다렸던 생각과 함께 내가 밀어주던 이여사의 등짝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20여년 전 진작에 이런 제품이 있었더라면 나의 엄마 이여사는 훨씬 더 수월하게 각질을 제거했을 텐데, 딸래미의 몸을 미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이여사의 등짝을 더 수월하게 밀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그래도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 이제라도 그녀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제품이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
한편으로 내 몸에서 떨어지는 때를 보며 ‘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요 몇 년 동안 나의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에 대해 홀로 꽤나 궁시렁거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다 때가 있고, 그 때란 누구에게나 다르다고들 하는데, 내 몸에 때가 있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사람들이 말하는 그놈의 때란 언제란 말인지.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성경에 꽤나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 3장 1절)” 현재는 그저 정신수양 하며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언급되는 그놈의 때를 기다리고는 있지만, 문득문득 조급해 오는 미련한 인간의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오늘 헬스장에서 트레드밀을 타며 LPGA 경기를 봤다. 경기 화면에는 작년 KLPGA 상금왕, 대상, 평균타수상을 모조리 휩쓸고 올해 LPGA에 입성한 윤이나 프로가 잡힌다. 매스컴과 수많은 골프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LPGA 성적은 만인들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본 기사에서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답답하지만 기다려 주실 거라고 믿는다. 나도 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다. 머지않아 나의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
오구 플레이로 징계를 받고, KLPGA에 복귀한 그녀는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당당하게 KLPGA를 평정했다. 그리고는 성적 압박 속에서도 LPGA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나는 그런 그녀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응원해 주어야 겠다고 결심해 본다. 내 스스로에 대한 기대에,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윤이나 프로의 말처럼 조급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리라고, 나도 잘 할 수 있다고, 그럼 머지 않아 너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오늘도 나의 엄마 이여사가 욕실에 비치해 놓은 필링젤을 사용해야 겠다. 내 피부에서 탈락해 나오는 때를 지켜보며, 내 때도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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