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되돌아 보면 아마도 내 직장인 인생에 최대로 정신없는 한해였을 것이다.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늘상 ‘워라밸’을 외치고 추구했다. 하지만 쓰나미 같이 닥쳐오는 업무에 아무런 짝에도 쓸모없는 외침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나에게 워라밸이란 무조건 칼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회사에 있는 시간에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충실하되, 퇴근을 하고 나서는 내가 계획한 바(예를 들어 운동, 독서, 자기개발 등)를 무리없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짜증을 내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대할 수 있는 에너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하지만 스트레스 과다와 기력 부족으로 퇴근 후엔 멍하니 누워있기 바빠 책 읽기도 어려웠고, 결제해 둔 강의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피곤함과 예민함이라는 발톱은 감추지 못해 결국 상대를 할퀴고 말았다. 그래도 어찌저찌 시간을 잘게 쪼개서 운동만큼은 했다. 유일한 소기의 성과다.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고갈로 내 옆의 사람에게 상처를 줄 만큼 내 감정선 컨트롤도 안되는데 내가 이러고 살면 뭐하나 싶은 감정, 피곤해서 눈에 활자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퇴근 후의 나,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인하여 왼쪽귀에서 오른쪽 귀로 곧장 바이패스 되는 강사의 강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워라밸 붕괴 현상을 목격하고 나니 내면의 분노가 차올랐고, 이 분노의 화살은 결국 회사라는 과녁에 집중 포화 됐다.
회사라면 이꼴저꼴 보기도 싫은 상황에서, 갑자기 대표님이 우리 팀과 함께 연말 식사를 제안하셨다. 아무리 회사가 밉상이어도 회사를 대표하는 자의 제안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 직장인의 숙명이다. 그리고 그의 파워 인맥이 십분 발휘되어 정해진 식사 장소는 바로 이목 스모크 다이닝.
사실 나는 흑백요리사를 보지 않는다. 흑백요리사 뿐만이 아니라 TV 자체를 거의 보지 않는 인간이다. 그래서 전혀 몰랐다. 여기가 유명 쉐프가 오너로 있는 식당인 줄은. 하지만 우리 팀 막내의 호들갑 덕분에 알게 됐다. 나름 유명한 곳이고 대표인 유용욱 쉐프도 셀럽이라는 사실을.
나는 속은 다소 퉁명스럽지만 자본주의적 미소를 장착한 비장한 프로의 태도로 식당에 입장했다. 그리고 대표님과 마주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회사는 여전히 밉상이지만, 막상 대표님과 마주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의 대장에 대한 정 때문인지 그에게 내 분노의 화살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냉동 삼겹살이나 사줘도 그만이었을 텐데 가격이 절대 싸지도 않은, 무려 참나무 장작을 활용한 훈연 바베큐를 사주시고자 직접 유용욱 소장를 통해 식당 예약을 하시지 않았던가. 그도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내게 업무 폭탄을 던지는 것은 아닐 테지, 하는 생각에 괜시리 회사에 분노의 불화살을 폭격한 내가 미안했다. 되려 나는 화살 하나를 들어 나에게 꽂았다.
이목 스모크 다이닝의 고기는 엄청 부드럽고 맛이 특이하긴 하다. 먹다 보면 다소 물리는 경향이 있어 많이 먹기는 어렵다만, 훈연향이 굉장히 짙고 특색있어 가끔 먹기에 좋을 맛이다. 사실 내 취향은 아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포크질을 하며 최선을 다해 먹었다. 내 워라밸을 깨트린 죄로 회사를 너무 많이 미워한 것 같아서, 나의 대장이 우리 팀을 세심히 챙겨주는 마음이 그래도 감사해서.
송년 회식을 마치고 몇일이 지나 나는 나의 대장님에게 메일을 한 통 보냈다. 메일의 내용은 내가 2025년에 이루고자 했던 목표들을 얼마나 이뤘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2026년에는 어떤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술한 내용이다.
내가 대장님에게 메일을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장님과의 송년 회식에서 내가 내 스스로에 꽂은 화살 때문에 피가 조금 났다. 그래서 피를 닦으며 스스로를, 그리고 2025년을 회고해 봤다. 회사는 분명 밉상이었지만, 그래도 회사는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고 나를 한층 더 성장시켰다. ‘회사가 나에게 지불한 값만큼 나는 그럼 회사에 돌려주었나?’ 를 자문하였지만 나는 어쩐지 속 시원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워라밸이 붕괴될 만큼 열심히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내 역량 부족으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좀 더 명석하고 스킬이 좋았더라면, 훨씬 더 적은 시간과 에너지로 업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더 시간과 에너지를 세이브 할 수 있었으며, 그렇다면 워라밸이 붕괴되는 현상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대장님에게 나의 부족함에 대해 사과했고, 2026년에는 어떻게 더 회사에 기여를 할 것인지에 대해 나름의 간략한 포부를 적어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장님에게 답장이 왔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뜻밖의 귀여운 이모티콘을 메일 말미에 붙여주었다. 대장님은 내가 피가 나는 것을 알았나, 반창고를 붙여주게.
나는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2026년도 역시 워라밸이 붕괴되는 현상을 겪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회사는 2026년에도 분명 밉상일 테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비난은 하지 않을 것이며, 핑계도 대지 않을 것이며, 원인은 나로부터 찾을 것이다. 피가 나도 어쩔 수 없다. 한 가지의 희망은 누군가 반창고를 또 살포시 붙여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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