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관심을 쏙 빼앗아 간 것이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배구다. 물론 내가 직접 하는 것은 아니다. 중계를 보기만 한다. 사실 배구는 내 신장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스포츠다. 하지만 만약 내 키가 만약 180센티미터가 넘었다면 엄마아빠가 배구를 시켰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신인 드래프트 1위로 지명되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수도 있었겠지, 라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무튼 배구는 재미있는 종목이다.
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작년 가을~겨울 즈음에 우연히 중계방송을 보게 된 이후 부터다. 보통 헬스장에서 트레드밀을 뛸 적엔 골프 중계를 틀어 놓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다. 트레드밀에 오르면 자동적으로 507 혹은 508(골프 중계 채널 번호)을 누른다. 하지만 골프 중계가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아무것도 틀지 않으면 뛰면서 심심하니 다른 스포츠 채널로 이리저리 돌려 본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시간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배드민턴, 탁구, 배구, 테니스, 당구, 농구, 축구 정도의 선택지가 있다. 그날그날 보고 싶은 종목이 다른데 어느 날 때마침 한창 시즌 중인 배구 라이브 중계가 있었다. ‘그래, 오늘은 배구다’ 나는 배구 중계 채널을 고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1시간이나 뛸 계획이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1시간을 뛰게 됐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시청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의 러닝머신은 STOP을 누르면 티비도 함께 꺼진다. 티비만 단독으로 켤 수도 없다. 웃어야 하는 일인지 울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화면을 보고싶은 자는 무조건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숙명인 곳이다.
공에 눈을 뗄 수가 없는 긴박함, 시원하게 코트에 내리 꽂아지는 스파이크, 그 스파이크를 막아내는 블로킹, 상대의 전열을 뒤흔드는 속임수. 이 모든 매력에 매료된 나는 요즘 퇴근 후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간다기 보단, 경기 라이브 중계를 보러 헬스장에 간다. 경기 중계를 보는 김에 겸사겸사 트레드밀을 뛴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기술이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트레드밀에서 어떤 선수를 보며 혼자 속으로 ‘와 쩐다’를 남발하고 있었는데, 그 선수는 바로 IBK 기업은행 소속 공격수 빅토리아다. 우크라이나 특급 그녀는 191센티미터의 장신으로 우아하게 뛰어올라서는 총알 같이 공을 상대 진영에 내리 꽂는다. 하얗고 고운 순딩이 같이 생겨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태도로 상대 코트에 폭격을 가하는 그녀의 앞뒤 다른 모습에 홀랑 반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간에 그녀의 동작은 우아하면서도 시원시원한게 매력으로 나의 요즘 최애 플레이어다. IBK는 그녀의 여권을 빼앗아야 한다. 그녀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그녀는 핵심 주포 답게 굉장히 잘 때린다. 영리하게 팁으로 넘겨 점수를 획득하기도 한다. 서브 에이스도 잘한다. 하지만 그녀가 제아무리 경기에 30점을 뽑아내도 팀이 질 때가 있고, 가끔은 그녀가 왜 저렇게 때렸지?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제서야 시선이 빅토리아에서 팀 전체로 퍼지게 된다. 본디 배구란 6명이 유기적으로 한 공정으로 잘 어우러져야 하는 게임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배구에는 세터, 아웃사이드 히터, 아포짓 스파이커, 미들블로커, 리베로라는 포지션이 있다. 이 각각의 포지션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상대의 서브가 넘어오면 리베로나 아웃사이드 히터가 안정적으로 받아내고, 두번째 터치에 세터가 공을 적절하게 띄워 마지막으로 공격수가 때린다. 상대의 서브를 받아내지 못하면 그대로 끝인 것이고, 서브를 불안정 하게 받으면 세터가 공을 제대로 띄우기가 어렵다. 세터가 공격수에 공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면 공격수는 좋은 타점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경기를 유심히 지켜봐보니 배구는 희생과 분업이 필수적인 종목이다. 화려한 스파이크 한 방을 위해 리베로는 온몸을 던져 상대의 강타를 받아내고, 세터는 자신이 득점하는 대신 공격수에게 공을 곱게 포장해 올려준다. 리베로는 득점을 할 수 없지만, 리베로의 수비가 없으면 공격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이야말로 정말 ‘원팀’ 스포츠다.

늘상 골프 중계만 봐오다가 배구 중계를 보아하니 배구는 외롭지 않은 것 같다. 골프는 스스로와의 싸움이다. (물론 캐디가 있지만) 스코어는 오로지 플레이어 혼자서 만들어 낸다. 선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연못이나 산속 깊은 곳에 처박아도 어쩔 수 없다. 처박은 자가 벌타를 먹든, 양말 벗고 호수로 들어가든 하여 꺼내야 한다. 때로는 본인의 실수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골프 채를 집어 던지거나 박살내는 선수의 모습이 중계에 잡히고는 한다.
반면 골프는 리시브가 조금 흔들려도 세터가 발 빠르게 움직여 좋은 토스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공격이 막혀도 동료들이 뒤에서 커버해주면 공격수는 다시 때릴 수 있다. 선수들은 범실이 나오고 실점을 해도 괜찮다며 서로를 다독인다. 골프와는 확연히 다른 이 모습이 내겐 빅토리아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배구는 ‘팀 스포츠란 무엇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종목이다. 이는 내 요즘의 일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다. 개인주의적(이라고 말은 하나 그냥 철없던 시절) 성향이 강한 나는 회사를 다니며 ‘팀’이라는 의식은 그다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팀에 유대감도 없고 회사에 정도 붙일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잦은 이직이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산전수전 이꼴저꼴 다 겪어보고 나니 조금은 철이 들었는지 조직 안에서의 ‘유기적 관계’와 ‘유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됐다.
아무리 뛰어난 리더나 엔지니어라도 모든 공정을 혼자 처리할 수는 없다. 연구소가 개발한 제품을 생산팀이 만들고, 영업팀이 팔아야 하듯, 나의 성과가 동료의 시작이 되는 연결의 연속이다. 내가 공을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독단이고, 조직의 흐름은 끊긴다. 동료의 실수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추궁하기보다 어떻게 이 상황을 살려낼까, 즉 리커버리에 집중하는 팀이 결국 승리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힘든 구간을 서로 독려하며 버텨내야 결과가 따라온다.
어느 날 IBK와 흥국생명의 경기가 있었다. IBK는 여자부 7개 구단 가운데 최고 수준 리베로로 평가 받는 임명옥이 아킬레스건 파열로 시즌아웃이 되는 악재를 가지고 경기에 나섰다. 1세트 2세트 모두 치열했다. 2세트는 듀스 랠리가 이어졌다. 빅토리아는 역시 주포 답게 양팀 내 최다 득점인 24점을 올렸다. 2세트 후반 빅토리아의 공격이 잘 안 풀릴 적에는 킨켈라가 결정적인 득점을 뽑아내며 경기의 흐름을 가져왔다. 임명옥의 부재는 백업 김채원이 열심히 몸을 날려 커버했다. 결과는 IBK의 셧아웃 승리. 이 경기는 라이브로 보고서도 무려 3번을 다시 돌려봤다. 앞으로 내가 회사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보여주는 지표 같았다. ‘힘들겠지만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는 플레이를 해야겠지, 회사도, 인생도’ 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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