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은 12개월로 나뉘고, 한 해의 시작은 1월, 그리고 마지막은 12월이다. 우리는 그래서 12월 31일이 지나, 1월 1일로 넘어가면 비로소 한 해가 지나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말한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1월, 2월은 아직도 그 전 해의 연장선상인 13월, 14월인 것만 같다.
어릴 적 나는 3월 부터를 새로운 한 해로 인식했다. 이는 달라진 교실, 새로운 학급 친구들,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주는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환경이 주는 어색함, 그리고 이 어색함이 내게 주는 스트레스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가장 명확한 시그널이었기 때문일 테다. 성인이 된 지금도 1, 2월은 아직 새해임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데 이는 살갗이 아리는 맹렬한 추위가 2월까지 지속되는 탓이다.
하지만 3월부터는 온화해지는 날씨, 솟아나는 봉우리들, 하나둘씩 피기 시작하는 꽃 들이 내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음을 몸소 알려주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어느덧 1년이 지났구나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나는 꽃을 보면 세월의 무상함도 느끼고는 한다. 그렇지만 꽃이 주는 형형색색의 시각적 즐거움과 은은하게 퍼지는 후각적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
나의 엄마 이여사도 꽃을 매우 좋아한다. 그녀에게 ‘꽃이 그렇게 좋아?’ 라고 직접적으로 물은 적은 없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될 만큼 그녀는 집안 곳곳에다 꽃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고 있다. 우선 그녀는 집 거실에 본인의 작은 화단을 꾸미고 있다. 또한 꽃 구독 서비스를 통해 매주 구성을 달리하여 식탁위를 화사하게 꾸며놓곤 한다. 나아가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잔마저 온통 꽃밭이다.
꽃이 피는 계절에 꽃을 좋아하는 이여사와 함께하는 여행이니, 나는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그녀에게 최대한 많은 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묵었던 포도호텔 근처에 있는 카멜리아 힐에 가는 방문 계획을 잡았다.
카멜리아에 방문한 이날은 수목원에 가기에는 더없이 화창한 날씨였음과 동시에, 서울로 다시 돌아가야하는 우리 모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다정한 날씨였다. 카멜리아 힐에는 카멜리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즐비했다. 벚꽃, 동백, 튤립, 철쭉 등 여러 꽃들이 피어나 만들어 내는 생명력과 화사함은 쾌청한 날씨와 맞물려 지나치게 싱그러웠다.
꽃을 구경하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 인생은 과연 지금 어느 계절 즈음에 와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이여사에 물었다. “엄마, 내 인생의 시간에서 봄은 이제 다 가고 여름이 시작된 걸까?” 이여사는 나의 물음에 “너의 시간은 그래도 아직 봄이지 않을까? 다만 여름을 앞둔 봄의 끝자락”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엄마는 지금 어디 즈음에 왔어?” 이여사는 다시 답했다. “엄마는 이제 가을에 와있지 않을까?”
이여사는 인생에 꽃이 만발하던 시기에 언니와 나를 낳아 봄과 여름도 보내고 어느새 가을에 왔다. 이여사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중심에는 언니와 내가 있었는데, 나는 과연 이여사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던 그 시절에 어떤 존재 였을까. 물을 뿌리는 존재였나, 재를 뿌리는 존재였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재를 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것 같아 미안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의 이여사 나이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 시기를 화양연화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만큼 나는 제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걸까? 답은 나도 모르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할 테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요즘 현재를 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봤다. “마음이 현재에 있어야 행복하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하고, 미래에 있으면 불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 시선이 어떻든, 주변 사람이 뭐라고 하든 나는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닌 현재를 사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과거의 내 잘잘못을 굳이 복기하지도 않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굳이 가불해 오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주어진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에 집중해 살다 보면, 미래의 내가 과거가 된 지금을 화양연화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혼자 하고 있다.
카멜리아 힐에서 실컷 꽃구경을 하고 선 다음 여정을 위해 출구로 나왔다. 주차장에 함께 걸어가려 하니 카멜리아 힐에 오기전 마보기오름을 오르신 탓에 이여사는 다리가 후들거린다며 본인 있는 곳까지 차를 빼오라 나에게 주문했다. 여사님은 운동부족으로 연약해졌다. 여사님, 인생이 가을이면 운동을 더욱이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추워져도 견뎌 내지요. 그리고 건강하셔야 딸래미의 화양연화를 오래오래 지켜보실 수 있지 않으시겠나요? 부디 저희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시 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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