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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커피리브레] 세상 맛있는 커피 앞에서의 세상 심오한 인생 고찰

  • 구입원두: 온두라스 베스트 파라이네마 2위 라스 팔메라스 내추럴, 콜롬비아 게이샤 리브레 셀렉션 디카페인
  • 노트: (온두라스) 플로럴, 파파야, 청포도, 밀크캬라멜, (콜롬비아 디카페인) 재스민, 복숭아, 말린사과, 캐러맬

커피 리브레의 서필훈 대표는 커피 회사 사장님 치곤 이력이 상당히 특이하다. 우연히 보게 된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우리나라 톱 명문대(SKY 중 하나)에서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진행하던 도중 돌연 마음을 바꿔 일식 요리사가 되겠다고 나서지만 자격증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다. 그는 시험을 망치고 학교 앞 단골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들이 마시며 '왜 커피 일을 해볼 생각은 안했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날 그가 마신 강배전 쿠바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인생커피가 된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 커피가 꼭 맛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원두 품질이나 커피의 맛과 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순간의 기억과 기분, 분위기가 사실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음에서 멀어지던 공부, 고배를 마신 일식 자격증, 불확실해진 미래, 그 모든 고민이 뒤엉킨 순간에 털어 넣은 그 한 잔이 저에게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았어요. 머릿속 안개가 걷히면서 마치 감전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터뷰 중 가장 의미있게 다가온 말이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가히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인생OO (예: 인생 음식, 인생 영화 등등) 들은 반드시 꼭 값비싸고 천재지변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설령 흔하디 흔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먹은 떡볶이, 치킨, 설렁탕 이어도 누구와 혹은 어떤 기분, 어떤 상황에서 먹었느냐에 따라 인생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인생OO이라 칭할 수 있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음식은 아직 까진 딱히 없는 것 같고 굳이 꼽자면 인생 이별이 있다. 이를 인생 이별이라 칭하는 이유는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간관계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그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마침내 알아 차렸으며 이후 내 가치관, 삶의 태도와 행동 양식이 상당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좋다. 이정도면 삶에 굉장한 족적을 남긴 인생 이별이 아닌가 싶다.

서필훈 그는 국내에서 스페셜티 커피가 생소하던 시절 이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다. 그가 처음 생두 직거래를 시작했을 땐 구매량이 워낙 적어 화물 컨테이너를 따로 쓸 수도 없어 우선 일본 지인의 컨테이너에 실어 일본으로 보낸 뒤 한국으로 다시 가져왔다. 그런 그는 직거래를 넘어 니카라과에서 농장 경영도 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스페셜티 커피 회사와 가장 큰 차별점이다. 직접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커피 회사는 정말이지 보기 어렵다.

커피리브레의 원두

그래서 커피 리브레에서 파는 원두는 늘 탐이 난다. 여러 원두를 사봤지만 늘 만족스러운 커피였다. 이번에 구입한 원두는 온두라스 파라이네마 내추럴과 콜롬비아 나리뇨 게이샤 디카페인이다. 이 온두라스 원두는 내가 그동안 먹어본 온두라스 중에 가장 부드럽고 온화한 맛이었다. 특별히 튀지 않으면서도 신맛, 과일맛, 단맛 모두를 잡은, 가히 밸런스 최고봉 원두라 꼽을 수 있다. 200그램에 3만원이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지만 충분히 값을 지불할 만하다. 콜롬비아 나리뇨 게이샤 디카페인은 내가 항상 사기를 벼르고 있다가 드디어 구매했다. 수많은 디카페인 원두를 찾아다녔지만 게이샤 디카페인은 커피리브레 말고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잔뜩 부푼 마음으로 원두를 분쇄하고 천천히 물을 부어주었다. 물 붓기를 시작하고 약 2분 30초 후 드디어 내 입 속으로 들어왔다. 맛있다. 전혀 디카페인 같지 않다. 이 좋은 걸 내가 왜 계속 구매를 미뤘을까 싶었다.

커피 리브레에서 판매하는 원두 봉투에 누군가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서필훈 대표에 따르면 커피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라 개별 생산자가 1년을 정성 들여 재배한 농산물이자 작품이란 걸 얼굴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한다. 한 잔의 스페셜티 커피가 테이블 위에 오르기까지는 바리스타 뿐만 아니라 로스터, 커피를 운송한 사람들, 커피 생산자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담겨 있는데 막상 사람들이 커피를 소비할 때는 이 숨은 얼굴들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정체성을 얼굴로 표현하고자 원두 봉투에 생산자의 얼굴을 이미지로 인쇄하게 됐다 한다.

원두 봉투에 그려져 있는 얼굴

서필훈 대표의 말처럼 얼굴로 정체성을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체성 위에는 내가 만든 이 제품에 책임을 진다는 프로페셔널의 의미가 있다 본다. 얼굴을 내보인다는 것은 나를 전면으로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다. 어떤 제품에 내 얼굴이 박혀있다 함은 내 정체성과 영혼의 일부가 제품으로 침습 되어 세상 앞에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 얼굴, 정체성, 영혼을 걸고 세상 앞에 이 제품의 QA(Quality Assurance)를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을 드러낸 다는 것은 결코 함부로,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커피 봉투에 그려진 얼굴을 보며 ‘프로’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수많은 작업물들을 앞에 두고 당당히 남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는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에 한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묻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아직 프로의 반열에 올라서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