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지점: 식스디그리스 라떼바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11-13)
- 마신커피: 롱블랙(에티오피아 반티 넨카)
- 노트: Syrupy, Fruity, Strawberry, Banana
호주 시드니에 잠시 거주했던 게 벌써 10여년도 더 된 이야기가 됐다. 학부생 시절 호기롭게 떠나 난생 처음 인턴이란 명목 하에 사회인 체험을 해봤고(비록 아주 맛보기 수준이었지만) 덕분에 사회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내가 당시 인턴으로 근무하던 사무실 밑에는 샌드위치와 각종 디저트 빵 그리고 커피를 파는 한 카페가 있었다. 그곳은 나의 방앗간 같은 곳이었고 일하며 커피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1층으로 내려가 동전을 내밀면(호주는 1달러, 2달러 모두 동전이다) 종업원은 갓 내린 롱블랙(Long Black)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롱블랙은 단순히 이야기 하자면 호주식 아메리카노 인데, 아메리카노와 같이 에스프레소와 물을 희석한 음료지만 제조 방식의 차이(에스프레소와 뜨거운 물을 붓는 순서가 서로 다르다)로 아메리카노 보다 크레마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물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훨씬 더 진한 풍미를 자랑한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의 맛과 향미가 많이 사라지는 반면 롱블랙은 에스프레소의 맛을 보다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동안 롱블랙을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서울에도 롱블랙을 파는 가게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가끔씩 나는 일부러 롱블랙을 찾아다니며 호주의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성수동에 롱블랙을 파는 곳을 발견해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게 됐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는 굉장히 요즘 성수동 스타일(뭐라고 묘사하기가 꽤나 어렵다)이다. 이름은 라떼바 이지만 롱블랙이 늘 간절한 나는 라떼가 아닌 롱블랙을 주문했다. 원두는 세가지(하우스 블렌드,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디카페인)중 택1 할 수 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에티오피아를 골랐다.
주문한 롱블랙을 기다리는 동안 카페 내부에서 프로젝트 빔으로 띄워주는 호주의 모습을 보며 내 20대의 한 켠을 차지하는 호주의 추억을 몽글몽글 떠올렸다. 처음 시드니 공항에 발을 내디뎠던 날의 차가웠던 공기(당시 호주는 겨울이었다),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혼자 앉아 보고싶은 엄마아빠를 떠올렸던 여러 날들. 그렇게 잠시 추억의 책장을 넘기고 있자 하니 곧 롱블랙이 나왔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한입을 마시자마자 프루티한 산미와 함께 내가 살았던 근처의 본다이 비치의 바닷내음이 나를 감싸 안는 듯했다. 식스디그리스의 롱블랙은 내가 호주에서, 내 방앗간에서 항상 동전을 내밀고 사마시던 그 맛과 거의 일치했다. 강산이 변할 동안 수많은 일들이 호주의 경험 앞으로 차곡차곡 쌓였고 호주는 저 멀리 뒷칸으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내 오감은 롱블랙 한잔에 찌릿하고 쭈뼛하게 반응해 순식간에 저 뒤에서 맨 앞으로 호주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왔다. 롱블랙이 에스프레소의 맛과 풍미를 음미할 수 있는 음료이듯, 식스디그리의 롱블랙은 내 호주에서의 추억과 향기를 충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아직 나의 시드니 방앗간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업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여기 서울에서도 충분히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릴만한 커피를 찾아내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내 안에서 넘실거리는 호주에 잔뜩 취해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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