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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단상

얄궃은 우연과 인연, 그리고 감사 (마지막으로 뒤끝 한 스푼)

‘야, 너 밥사주고 싶은데 시간 언제 되냐?’ 내 속마음을 터놓는 정말 몇 안되는 친구 N이 나에게 느닷없이 밥을 사주겠다며 연락을 해왔다.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의 수가 적어지고, 굳이 발을 넓히고 싶지도 않아 하는 나는 요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감사를 느낀다. 갑자기 연락해서 나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N의 연락을 받고서도 꽤나 길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난 N은 나의 첫 직장 동료로 천성이 호탕하고 밝다. 또한 전투적이고 용감하다. 그녀에게 늘 배우고 싶은 삶의 태도다. N은 스무 살이 되어서 한국으로 건너왔는데,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일절 기죽지 않고 당당히 할말 다하며 살아내는 모습이 나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풍기는 마성의 매력에 나는 빠른 속도로 매료됐고, 때마침 우린 코드가 잘 맞아 매일 같이 사내 메신저로 이러쿵 저러쿵 사회 생활의 어려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때때로 피곤한 날엔 둘이서 싸인을 주고받고 지하 주차창에서 만나 점심시간 내내 그녀의 차 안에서 같이 담요를 덮고 귤을 까먹거나 잠시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지난 직장 생활의 낭만이라고 하면 그녀와의 추억이 많이 떠오른다.

서로 이직을 하고서도 우린 꾸준히 연락하며 가끔 만나 밥을 먹었고, 서로가 바빠 정말 오랜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대화에는 막힘이 없다.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늘 찰떡같이 알아듣는 N은 나의 ‘지음(知音)’ 이다.

그런 N을 거의 1년 동안 못 보다가 그녀의 고마운 연락으로 만남이 성사됐다. 만나기 바로 전 주가 N의 생일이었기도 해서 그녀를 만나기 전 미리 선물을 사뒀다. 사실 우리의 약속 일엔 내가 감기몸살로 컨디션이 엉망이었으나, 그녀의 선물을 사 놓기도 했고 돌아오는 주엔 내가 해외 출장을 떠나야 해 약속을 다시 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또 흘러야 할 것 같아 나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휴지로 틀어막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생각보다 길이 막히지 않아 약속된 시간 보다 20여분을 일찍 도착했다. 통이 큰 그녀가 예약한 곳은 줄 서서 기다린 뒤 오픈 시간 정각에 입장할 수 있는 호텔 뷔페여서, 일찍 온 김에 미리 줄이나 서자 싶어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보통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보는 편인데 이날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두 어장 읽다가 이내 읽기를 포기하고는 속속들이 도착하여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고 있는 그날의 예약 손님들을 구경했다.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 3세대가 함께 온 가족, 임신한 아내에게 양껏 먹이기 위해 아내를 챙기는 남편,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연인들, 외식이 즐거운지 한껏 들떠 뛰어다니는 아이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넋 놓고 사람들을 관찰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지 반년이 넘었다. 그는 약 반년 전에 헤어진 나의 ex K다. 그의 옆엔 과거의 내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여자친구가 있었고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K는 나를 못 보고 지나쳤지만 나는 지나가는 K를 보며 세상은 참 웃기면서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하고 많은 곳에, 어제일 수도, 내일일 수도, 내가 출장을 떠난 다음주 일수도 있는 하고 많은 날 중에, 점심 시간대가 아닌 저녁 시간일 수도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왜 우연은 얄궂게도 K와 K의 여자친구를 내 눈으로 보게 하였을까?

K와 관계를 정리하고 K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그와의 관계에서 놓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의 어떤 니즈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을까, 나는 왜 만나는 동안 그에게서 많은 결핍을 느꼈을까, 왜 그때 그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과거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일까, 내가 좀 더 생각이 깊었다면 그를 더 감싸고 배려해줄 수 있진 않았을까 등등. 과거에 대한 미련이라 기 보다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나의 회고와 반성이랄까. 나는 K와 이별 후 싱글의 시간을 1년 넘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나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사람과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반년 넘게 소식을 모르다가 그의 새 출발 사실을 알게 되니 왠지 모르게 콧물이 양껏 더 주르륵 흐르는 기분이었다.

N이 도착하고 나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겪은 이 웃긴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었다. N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뜸 나에게 “여친 예쁘더냐?”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장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이겼어.” N은 끄덕끄덕 하더니 “그럼 됐다. 음식이나 기쁘게 담으러 가자.” 우리는 마주보며 한바탕 크게 웃고는 접시에 각종 회, 고기, 대게 등을 듬뿍 담고 몇일을 굶은 고아처럼 우걱우걱 먹으며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N과 함께 후식으로 먹은 리치 빙수

푸드 파이터처럼 N과 정신없이 뷔페를 휩쓴 후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린 짜이지엔을 외쳤다. 다시 혼자가 되고 나니 차분해져서 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채 이런 저런 생각을 마주하게 됐다. 좁고 좁은 세상, 과거에 대한 반성, 엇갈린 인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서 날 지켜주는 인연 등.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에 오가는 가운데 인생과 인연 역시 마치 도로주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인 즉슨 인생과 인연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내 뜻대로 절대 되지 않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 가가 늘 개입하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로사정에 구애받지 않고 내 목적지로 막힘없이 가고 싶은데 자꾸 빨간 신호에 걸리기도 하고, 속도 제한 구역에 들어서면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고, 많은 차량에 의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며, 길을 잘못 들어 뺑뺑 돌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접촉 사고가 생기기도 하듯.

K와도 그렇고, 내 친구 N과의 인연도 그렇다. 모든 인연은 제 각기 소중하고 무탈하게 지키고 싶지만 아무리 내가 노력한다고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다. K를 우연히 목격하고 난 후 N에게 더욱 감사함을 느꼈다.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몇 안되는 나의 인연이고, N 또한 나와의 인연을 위해 노력해 주기에. 앞으로도 나는 N과의 인연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응원해주며 지지해주고 싶다.

K를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후 대략 1년이 지나 나는 우연히 K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아마도 내가 그때 본 그녀와의 결혼이겠지. K는 소원하던 대로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싱글이다. K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그간 난 무엇을 하고 산 것인가 싶은 약간의 자괴감도 드는 한편, 내 자괴감과는 별개로 K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빌었다. 하지만 약간의 뒤끝은 남겨야겠다. 외모는 단언컨대 내가 압승이다. 행복해라.

나는 이 그림 속에서 너와 함께 있어도 먼 발치만 바라보게 되는 내 모습을 봤다. 진정한 배필과는 행복하길. (에드바르 뭉크 作 두 사람, 외로운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