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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부터의 사색/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2024)

[코타키나발루 3화] 샹그릴라 선셋바에서 탄중아루의 해질녘을 바라보며 2024년을 회고하다

해질녘은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존재다. 복잡미묘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나 좋으면서도 심오해지기 때문이다. 우선 선셋의 따뜻한 색조가 좋다. 특히나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해가 거의 넘어가기 직전인데, 어둠과 슬며시 바톤터치를 하며 만들어 내는 따뜻함과 차가움의 대조가 숨막히도록 예쁘다.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일몰을 기다리며 연신 신나게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은 마치 최애 아이돌의 출퇴근길을 보기 위해 한참을 기다린 후 마침내 발견하고선 끊임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10대 소녀 같다.

한편으론 노을은 내 심경을 복잡하게 만든다. 저무는 해를 보며 오늘 하루는 잘 살아 냈는지, 내 인생은 괜찮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반추하게 된다. 내 인생도 언젠간 이렇게 저물겠지 하는 생각으로 삶이 참 덧없고 인생무상하다 느끼며 좀전의 10대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90넘은 할머니가 나타난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확실한 건 나는 선셋을 좋아한다. 그리고 탄중아루해변은 선셋으로 아주 유명하다. 휴가지를 코타키나발루로 선택한 데에는 코타키나발루의 선셋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아주 작심하고 탄중아루의 선셋을 즐기기 위해 샹그릴라 프론트에 미리 선셋바 예약을 말해두고 5시 오픈 시간에 맞춰 입장했다.

샹그릴라 탄중아루의 선셋바 입구

아직은 통렬히 빛나고 있는 태양 아래 테이블에 앉아 음식료를 주문하고는 푸른 바다를 바라봤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바다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청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제일 먼저 주문한 코코넛 워터가 나왔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기껏 바에 와서 칵테일 한잔 안 마시고 이리도 건전히 코코넛 워터만 마시는 테이블은 우리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해는 서쪽으로 저물기 시작했고 비어 있던 좌석도 하나 둘씩 채워져 만석이 됐다. 꼬치구이, 새우튀김, 야채스틱과 사테이를 시켰는데 하루 종일 리조트 안에서 신나게 놀아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해보다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결국 해보다 음식이 먼저 모조리 사라졌다.

선셋바가 새겨진 코코넛 워터와 시킨 음식들

비록 내 허기짐은 음식을 기다려 주진 않았으나, 선셋에 대한 기대감은 해를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 많은 음식을 다 해치우고 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해가 노란빛과 주홍빛을 띄며 화려하게 작별인사를 고하기 시작했다. 얘는 언제 자러가나 싶었던 것이 순식간에 바다 밑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고, 내려갈 때 마다 분 단위로 내뿜는 색조가 달라졌다. 

숨을 죽이고 태양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니 파란 하늘은 어느새 하늘은 노란빛, 주황빛, 분홍빛, 보랏빛으로 모조리 덧입혀졌다. 그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으로 낭만적이고도 장엄했다. 코타키나발루가 2024년의 나 정말 수고가 많았다고 이렇게 선물을 주는구나, 내가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그렇게 이날의 해는 졌다. 그리고 2024년도 다 저물었다. 나의 2024년은 별의 별일이 다있었다. 인간의 생멸을 여러차례 지켜봤고, 인간의 앞뒤 다른 양면성에 고개를 떨구기도 했으며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니 당시에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던 일들이 실은 내 행운의 열쇠였고, 흘러온 시간은 그 열쇠를 내 손에 쥐여줬다. 그 열쇠로 미지의 상자를 열었더니 값을 매길 수 없는 기회와 행복이 넘쳐났다. 그래서 나는 이 보물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내 주머니 안에 모두 넣었다.

2024년의 해는 저물었지만 2025년의 해는 다시 떠오른다. 다시 떠오르는 해 아래서 나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사고 싶은 걸 사며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쓰고 싶은 것(글)을 쓰며 소신있게 살겠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내 자신에 만큼은 상관 있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다시 선셋 앞에 섰을 때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모드가 아닌 10대 소녀가 되어 ‘나 열심히 살았다고 이렇게 또 예쁜 선물을 받는구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마음껏 셔터를 누르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