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키나발루로 출발하기 전 방에서 짐을 싸며 어떤 책을 들고 갈까 책장 앞에서 서성였다. 책장에선 책 4권이 나와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나겠 노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이 4권은 서점에서 나에게 간택 당한 이후 아직 한 번도 읽히지 못한 불운의 책들로 사회과학, 예술, 소설, 자기개발 각기 다른 장르다. 세기의 선택 마냥 고심하다 마침내 소설책을 골랐는데 이는 바로 파울로 조르다노의 장편소설 <소수의 고독> 이었다. 휴양지로 떠나니 그저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선택된 이 소설은 나머지 3개의 쟁쟁한 경쟁상대를 물리치고 그렇게 나와 함께 해외 여행길에 오르게 됐다.
샹그릴라 탄중아루의 야외 수영장엔 아이들이 맘껏 물장난을 칠 수 있는 풀장도 있는 한편 아이들은 출입할 수 있는 성인 전용 풀장이 따로 있다. 조용함을 좋아하는 나는 성인용 풀장으로 들어가 그늘진 선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동용 풀장에 잠시 난입해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워터 슬라이드를 신명 나게 탔다. 흥미진진했다.)
잠시 풀장에서 수영을 즐긴 후 몸을 닦고 나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켰다. 각종 칵테일, 샴페인, 스파클링 와인 등 휴양지에서 마실법한 음료들이 즐비했지만 알코올 쓰레기인 덕에 난 늘 커피다.
밝고 해가 쨍쨍한 날씨, 그리고 잔뜩 신이 난 사람들, 따뜻한 날씨에 평화롭게 누워있는 나,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책 <소수의 고독>. 문득 책과 현재 주변 환경이 상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은 바뀌었다. 어울린다 생각해 시작한 너와 나의 관계는 막상 붙여 놓으니 날이 갈수록 서로가 서로를 병들게 하는 조합이었고, 이게 말이 되는 조합인가 싶었던 차돌 고사리 파스타가 생각보다 매우 훌륭했듯이 날이 화창하다고 꼭 밝은 책이 어울린다는 법은 없으며 오히려 생각치도 않게 다소 침울한 내용의 책이 지금 환경의 나와 페어링이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수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모든 수가 그렇듯 소수는 두 개의 수 사이에서 짓눌린 채 무한히 연속하는 자연수 안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다른 수보다 한발 더 앞서 있다. 소수는 의심 많고 고독한 수다. (중략) 대학 1학년 때 마티아는 소수 가운데 좀더 특별한 수가 있다는 걸 배웠다. 수학자들은 그 수를 쌍둥이소수라고 부른다. 쌍둥이소수는 근접한 두 수가 항 쌍을 이루는데,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가 그렇다. (중략) 마티아는 자신과 알리체가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이 방황하는 두 소수.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 소수. (p.191~192)
책에서 말하는 소수는 소수(少數, Minority)가 아닌 소수(素數, Prime Number)다. 나는 학창시절 소수가 이상하고 낯설다 느꼈다. 약수가 1외에는 없다는 게 마치 무언가를 나에게 숨기고 있는 듯한 수상쩍은 기분이랄까. 그땐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소수를 닮았다. 나는 36처럼 1, 2, 3, 4, 6, 9, 12, 18, 36 같은 여러 친구들이 없다. 나에겐 아주 한정된 인간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소수를 닮아 놓고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생각하니 문득 소수에게 미안해진다.
알리체는 그것이 이제 막 결혼을 마친 부부 사이에 생긴 첫번째 반쪽짜리 진실이자 첫번째 미세한 균열이 되리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언젠가는 삶이 그 균열을 통해 굳게 닫힌 자물쇠를 열어젖힐 것이다. (p.295)
어린시절엔 ‘이번만 그냥 하지말자’, ‘이 정도 별거 아닌 일은 그냥 무시해도 되겠지’ 하는 일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네 번이 되는 건 일도 아닌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고수하겠다 마음먹은 원칙과 계획을 한 번 거스르기 시작하면 원칙과 계획의 궁극적 원형은 형체 없이 갈기갈기 찢긴다. 상호간 신뢰에 난 작은 생채기는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사소한 게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 내가 미련해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해 전 몇 번인가 편지를 보낸 그 주소지에 그가 아직도 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이사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됐을 것이다. 그녀와 마티아는 무의미한 것들 아래 묻혀서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서로에게서 자신의 고독을 알아본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실로 그들은 이어져 있었다. (p. 406)
어딘지 모르게 나의 일부를 지닌 것 같은 사람을 가끔씩 보게 된다. 그게 나의 좋은 면이든 싫은 면이든 간에 그 일부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그런 사람. 그런 느낌을 받은 몇몇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아무런 기약 없이 끝이 나버린 몇몇도 있다. 두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실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실이 선연의 매개가 될지, 악연의 매개가 될지는 시간만이 답해줄 것이다.
이제야 그는 깨달았다. 선택은 한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남은 생애 내내 지속된다는 걸. (p.442)
이 한 줄을 읽고는 실로 많은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가 꽤 오랜 시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돌아보니 후회가 가득한 선택,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에게 남겨질 선택의 몫. 나는 평생에 이 몫을 짊어지고 가야겠지. 그렇게 내 선택을 책임져야 겠지.
알리체는 골짜기로 추락해 눈에 파묻혔던 때를 떠올렸다. 그 순간의 완전한 고요를 생각했다. 지금도 역시 그날처럼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았다. 알리체는 투명한 하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그녀 혼자 일어설 수 있었다. (p.455)
나 역시 심연의 어둠 속에 파묻혔던 때가 있었다. 모든 것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오로지 홀로 침잠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도 찾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난 혼자 일어섰다. 앞으로도 또다시 추락할 날들이 찾아오겠지만 나는 목발을 짚고서라도 다시 혼자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블링블링한 리조트의 선베드에서 한껏 고독한 책을 읽은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책과 주변 분위기는 상관이 없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즐기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그간 수도 없이 독서를 했지만 선베드에서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상당히 좋은 경험으로 남아 다음에도 다시 해보려 한다. 그때는 어떤 책들이 서로 자기가 함께 가겠다고 손을 들런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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