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놀이터에 나가 뛰어놀기를 매우 좋아했다. 나의 엄마 이여사는 늘 저녁때면 밥 먹으러 들어오라 창문 밖으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밥은 커녕 열심히 뛰노는데 정신이 팔려있어 이여사의 말을 한번에 들은 경우가 손에 꼽았고, 결국 매번 이여사는 나를 직접 검거하러 문밖을 나와야 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뛰어나가 놀길 좋아하는 기질은 나의 아빠로부터 유전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씨 일가와는 달리 한씨 일가에서는 체육 교사 등 체육 관련 직종의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고, 나의 아빠 역시 운동신경이 좋으시다. 덕분에 나는 다른 상은 못 받아도 체육 교과 우수상은 중, 고등학교 6년을 매 해, 매 학기마다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헬스, 골프, 주짓수, 테니스, 필라테스, EMS 운동, 자전거 등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왔으나, 현재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운동은 달리기다.
“꽤나 단순한 이유로 시작한 달리기”
사실 난 어렸을 적 달리기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게 소질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학창시절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배구,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 구기종목이었지 육상 종목은 아니었다. 그러던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냥 멋져보여서’다. 양껏 땀을 흘리며 쉬지않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괜시리 멋진 도시인들 같아 보였다.
달리기를 하면서 쌓이는 것은 “인내”와 “성취감”
처음에는 5분을 쉬지 않고 뛰는 것도 힘들었다. 단 몇 분만 뛰어도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고, 트레드밀에서 계속하여 속도를 높였다 줄였다를 반복하기 일수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하여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그러다 보니 단 5분만 뛰어도 헉헉거리던 나는 어느샌가 10분, 20분, 30분 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1시간도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10분도 뛰기 힘들었던 초보 러너 시절에도, 1시간도 뛸 수 있는 지금도 나는 늘 인내하며 뛴다. 어느 날엔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지독히도 목표점이 멀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런 날엔 애꿏은 내 손목의 스마트 워치와 트레드밀 탓을 한다. ‘너네 세트로 고장난거 아냐? 왜 아직도 4km야? 도대체 언제 7km를 뛰라는 거야? 어휴 죽겠네’. 하지만 내가 뛴 거리와 시간을 측정해주는 이 두 기계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합창한다. ‘4KM’
이런 날엔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 중간에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겠다는, 오늘의 목표치는 반드시 달성하고 말겠다는 나 자신과의 결투. 남들 눈엔 그저 평온하게 뛰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혼자 트레드밀 위에서 치열하게 나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투 끝에 결국 그날의 목표치를 달성해 내고 이내 일상에서 소소하게 나마 성취감을 획득한다. 그리고는 혹여나 나를 골탕먹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두 기계를 당당히 내려다본다. ‘니들이 아무리 짜고 쳐도 소용없다.’
“사람은 항상 자기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고 봅니다.” – 넷플릭스 더크라운中”-
20대엔 달리기의 묘미를 몰랐다. 그저 지루하게 느껴졌고, 보다 다이나믹하고 순발력을 요구하는 운동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30대의 나는 20대와 삶이 너무나도 달라졌다. 20대의 대부분은 돈을 주고 배우는 학생 신분으로 살아 배운만큼 공부하고 성적만 내면 그만인 삶이었다. 원하면 언제든 수업은 땡땡이 칠 수 있는, 책임이 가벼운 삶이었다. 하지만 30대의 나는 누군가로부터 고용되어 돈을 받고 일하는, 그리고 받은 만큼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많아지는 삶이 되었다. 원한다고 언제든 땡땡이 치고 도망갈 수 있는 20대의 삶이 아니게 된 것이다.
내게 부여된 수많은 의무와 기대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고단한 인내가 필요하다. 세상은 절대 내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어떻게든 제 시간에 해내지 못하면 모든 게 내 탓이 되어버린다. 또한 풀어내야 할 복잡한 문제에서 늘상 도망칠 수도 없다. 이러한 세상에서 나는 부단한 인내를 가지고 그저 묵묵히 내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아내, 엄마의 삶을 원했던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이 엘리자베스 2세가 되어 왕좌의 의무를 감내했듯.
나는 달리기 덕분에 인내를 배웠고, 이 인내를 30대가 된 내 삶에 적용한다. 그리고 인내의 연속인 삶 속에서 묵묵히 내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며 산다. 아마도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저 인내란 모르고, 책임은 회피하며 하기 싫은 일로부터 도망가기 급급했던 지난 나의 철없던 20대의 정신 세계에 갇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뛰고 싶을 뿐입니다.” – 영화 포레스트 검프 中 –
달리기는 나에게 다소 격한 명상 방법이기도 하다. 삶이 고단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그저 트레드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무아지경으로 뛰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땀 범벅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다소 불안정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으며 내면이 아주 고요한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달리는 도중에 생각치 않게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지금 나에게 달리기는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예전처럼 단순히 멋져보여서가 아닌 포레스트 검프의 말처럼, 나는 그저 뛰고 싶어 뛴다. 달리기는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며, 조그만 성취감을 통해 내 자존감을 지켜주고, 나의 내면을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나를 수양시킨다. 그래서 나는 달린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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