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엔 늘 노트를 들고다니며 끄적끄적 외워야 할 것들을 직접 써내려가며 공부를 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나서부턴 직접 노트에 쓰기보단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펜을 잡는 일이 매우 드물어 졌다.
그러던 내가 최근 필사를 시작했다. 필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나의 어휘력과 문장력이 많이 부족하다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 시작점이다. 그리고 이를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유선경 저, ㈜위즈덤하우스)> 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다. 이 책의 유선경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휘력과 문해력, 문장력은 독서와 필사, 글쓰기를 함께 실행할 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나마 짧은 기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성장합니다. 특히 필사는 가장 깊이 책을 읽는 방법입니다. 눈으로 읽을 때는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가 읽힙니다.”
서문을 읽자마자 필사가 내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라는 강력한 직관이 찾아왔고 그렇게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필사 여정을 시작했다.
“베껴쓰는 것 이상의 가치창출”
필사란 말 그대로 글을 베껴 쓰는 것인데, 그저 글을 베껴 쓰는 이 행위에는 다양한 효용이 있는 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도 필사를 했다.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250번이나 베껴 썼다.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의 저자 서머싯 몸은 자신의 글쓰기 비결에 대해 “나중에 써먹을 요량으로 깊은 인상을 준 문구들을 베끼고, 또 기이하거나 아름다운 단어들의 목록을 작성했다”고 한다. <거장처럼 써라>의 저자 윌리엄 케인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등 위대한 작가들의 사례를 언급하며 필사를 훌륭한 글쓰기 학습법이라고 설명한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줄한줄 꼭꼭 씹어먹기”
글을 빠르게 읽는 법을 습득하고 나서부턴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책을 휘리릭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독서법은 이내 습관이 되어 책 한 권을 해치우는 건 식은 붕어빵 먹는 일 같은, 정말 일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읽어도 글의 맥락 속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략 예측이 가능하고, 책 속에서 내가 원하는 정보만 손쉽게 골라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 독서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저자가 고심하여 직접 고른 단어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표현 방법들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말과 글에는 특정 단어와 특정 표현을 쓴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있는 것인데 나의 독서법은 저자의 의도를 묵살한다. 그리고 하도 빠르게 읽는 탓에 전체적인 내용은 기억에 남으나 주옥 같은 수식어, 은유 그리고 입체적 묘사 방법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없다. 그리하여 나는 기존의 내 독서 방법을 과감히 제쳐 두기로 했다. 그리고 문장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쓰기로 했다.
“필사의 1+1 효과, 자기성찰”
필사를 시작한 최초의 목적은 글쓰기를 위한 어휘력과 문장력 상승이었고, 나아가 작가들의 문장을 보다 더 면밀하고 세세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한국인 30여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보는 한국어들을 알게 됐고 내 글엔 그간 없던 다양한 수사법을 활용하기 시작하며 본디 원하던 효과는 현재 누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필사를 통해 생각치 못한 또 다른 효과를 얻었는데 이는 내 삶의 태도 반성이다. 필사는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창작 활동도 아닌, 그대로 베껴 쓰는 행위가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문장을 여러 번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써내려 가면 눈으로만 읽었을 때와는 또다른 차원의 울림이 전해진다.
나는 그간 복잡하고 인내가 필요한 건 그 일이 무엇이든 상당히 피해왔다. 공부도 마찬가지고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는 과감히 접고 오답의 이유를 전혀 파헤치지 않았으며, 상대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인내하며 성숙해 가는 사랑을 하기 보단 그냥 헤어지기를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인내하며 이해하길 딱 한 뼘만 더 노력했다면 또 다른 학습의 울림, 그리고 사랑의 울림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간의 인내 없는 내 인스턴트식 태도를 되돌아보게 했다.
“오늘밤, 또 어떤 문장이 나에게 울림을 주기를 기다고 있을까?”
모든 일과를 마친 밤이면 책상에 앉아 고독의 필사 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오늘밤엔 어떤 주옥 같은 문장을 만나 울림을 받을지를 잔뜩 기대하며 책을 펼친다. 이내 상상 이상의 문장을 마주하게 되면 기쁨의 미소를 환히 지으며 문장을 써내려 간다. 동시에 마음속에도 새겨 넣으며 힘들었던 하루를 온전히 보상받았다는 생각을 한다. 글쓰기를 위해 시작한 필사는 이젠 어느덧 단순히 글쓰기를 위해서가 아닌, 살기위한 행위로 변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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