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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도곡동 젠틀커피] 비오는 저녁, 약속장소에 들르기 전 젠틀한 태도 다듬기

퇴근 시간이 남들보다 이른 나는(물론 남들보다 출근시간도 이르다) 항상 남들보다 일찍 도착하게 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래서 내가 택한 남는 시간 활용 방법은 바로 약속 장소 근처 카페 탐방이다. 굉장한 집순이력을 자랑하는 나는 매우 큰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 퇴근 하고서도 귀소본능이 확실한 인간이다. 커피 마니아로서 이곳저곳 열심히 카페를 나돌아 다닐 법도 하건만, 내겐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 하지만 어차피 밖에 나와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의 전개는 달라진다. 새로운 카페에도 가보고, 시간도 때우면서,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다? 내향적 집순이에게는 탁월한 시간 활용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평일의 저녁, 약속이 있어 도곡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날도 역시 약속 시간 보다 무려 1시간 가량 시간이 남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정해졌다. 카페 탐방. 약속 장소가 정해지고 가장 먼저 내가 한 행위는 그 근처 카페 찾기다. 휴대폰을 뒤적뒤적하다 어렵지 않게 갈 곳을 결정했다. 그 곳은 바로 젠틀커피.

젠틀커피 입구

커피 맛도 아주 젠틀하면 좋으련만, 하는 마음으로 우산을 양옆으로 물이 튀기지 않도록 얌전히 접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우산도 젠틀하게 접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매장이 특이했다. 커피와는 상관없는 젠틀맨들이 착용할 만한 물품들이 문 앞에 전시가 되어 있었다. 모자와 양말이라니. 카페에서 볼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할 품목이다. 마치 테일러샵에 온 느낌이다. 대개 카페에 들어서면 매장 구경 보다는 원두로 먼저 돌진하는 편인데, 젠틀커피에서는 ‘아니 이게 뭐야?’ 하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렸던 듯하다.

카페인가 양장점인가?
젠틀카페 내부
모자와 양말이라니
커피 도구가 있는 것을 보니 카페기는 하네
팔고있는 원두들

매장 구경을 마치고 그제서야 원두 앞으로 향했다. 블렌드 원두 2종, 싱글오리진 4종이 있었는데 싱글오리진 종류들은 모두 제너럴한 스페셜티 커피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중 가장 내가 맛있게 마실 것 같아 보이는 에티오피아 빌로야 G1 내추럴 한 봉을 고르고, (저녁이었므로) 차를 한잔 주문해 테이블에 앉았다.

나의 픽, 에티오피아 빌로야 G1 내추럴

시계를 쳐다봤다. 아직도 약속 시간 까지 40여분이 남았다. 비는 여전히 주륵주륵 내린다. 홀로 조용함을 즐긴다. ‘그냥 혼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집에나 가면 좋겠어’ 약속 장소에 나가기가 점차 싫어진다. 마치 영국의 오래된 신사 사교클럽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젠틀하지 못한 생각들을 마구 해본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스스로 젠틀우먼 프레임을 억지로 씌운다. 존중, 성실, 정직, 절제, 경청, 배려, 겸손, 품위, 책임감, 자기관리. 다 내팽겨 치고 살고 싶은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잘 해내야 된다는 생각이 나를 이따금씩 짓누른다.

주문한 캐모마일 티가 절반 정도가 남았다. 나머지를 호로록 모두 마시고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커피 원두를 가방에 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접어 매장 앞 우산통에 넣어둔 우산을 다시 얌전히 펼쳤다. 그리고는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시간 10분 전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약속했던 사람을 만났다. 그다지 맛은 없었지만, 상대가 고른 음식점이었기에 맛있다며, 좋다며 연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피곤했지만 최선을 다해 떠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내 나름 젠틀하게 보낸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