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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4화] 동시성 운명과 파르페 (세렌디피티3 카페 앞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구경하고 나와 커피도 한잔 마시고 거리 구경도 할 겸 어퍼이스트 사이드 쪽으로 향했다. 두리번두리번 뉴욕을 배회하며 최대한 곳곳을 마주하려 했고, 마치 그간 봤던 뉴욕 배경의 영화 한 장면 속 주인공으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뉴욕을 천천히 내 안으로 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어퍼이스트에서 꽤 많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내 근처에 세렌디피티3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누구에게나 다시 돌려보고 싶은 영화가 있듯 나에게도 그러한 영화들이 몇 개가 있다. 특히나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보고 또 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시절 처음 봤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영..
[성수동 어페어커피] 평화로운 뚝도시장에서 기괴한 하이브리드 감정을 느끼며 방문지점: 어페어 커피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6길 11 1층)마신커피: 케냐 가타이티 AA TOP Washed (노트: 자몽, 키위, 다크초콜릿)구입원두: 에티오피아 게뎁 가르가리 구티티 G1 (노트: 베르가못, 레몬, 백도)대도시 아파트촌에서 태어나 일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시장은 다소 낯선 광경이다. 하지만 이 낯선 감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나는 해외 여행을 갈 때 시장을 일부러 찾아 구경할 만큼 생소하지만 신기한 시장 구경을 고대한다. 평생을 백화점, 쇼핑몰만 다닌 나에게 상인들의 언행은 다소 투박하다. 하지만 과잉 친절 혹은 미소 속에 숨겨진 듯한 가식의 일면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리고 손님을 방치해 두는 그들의 거친 매력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만들기도 한다.평일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시장은 ..
[뉴욕 3화] 재즈와 함께한 재즈 같은 밤 (버드랜드에서) 뉴욕에 도착한 첫날, 비가 참 많이도 내렸다. 혼자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구경하고 나와서는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찬찬히 걸어 저녁 약속장소인 한 재즈 클럽으로 향했다. 이 재즈 클럽의 이름은 버드랜드(Birdland). 버드랜드는 브로드웨이에서 1949년에 처음 문을 연 나름의 역사적인 장소로 현대 재즈사의 상징적 인물인 찰리 파커가 헤드라이너 였다. 그래서 클럽 이름은 찰리 파커의 별명(버드)을 따 버드랜드라 지어졌다. 그 이후 재즈의 쇠퇴로 1965년에 문을 닫았지만, 1986년에 재개장하였고 현재는 브로드웨이가 아닌 West 44번가에 위치해 있다. 나는 West 44번가를 찾아 비오는 거리를 뚜벅뚜벅 걸었다. 처음 마주한 나를 보고서도 전혀 낯을 가리지 않은 채 멀리서도 날 반갑게 맞이해 ..
[성수동 에이치커피로스터스] 커피 본연에 충실한 카페에서 세상 온화한 에티오피아를 발견하다 방문지점: 에이치커피로스터스 성수(서울 성동구 성수일로11길 10 1층)마신커피: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디카페인 (노트: 라임, 오렌지, 블랙티, 초콜렛)구입원두: 에티오피아 게샤 카르마치 내추럴 (노트: 장미, 라즈베리, 파파야, 꿀)직장생활에서 찾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보물 같은 카페를 탐색하고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다. 이걸 노리고 입사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세상 핫하다는 성수동에 근무하게 됐고 그 덕에 좋아하는 스페셜티 커피를 꽤나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행복을 맛보게 됐다. 운명이라는 게 이런걸까, 내 선택의 결과물들이 하나둘씩 모여 또다른 선택지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그 선택은 또 다른 여정의 시초가 되는 것. 이러한 상황이 무한반복되며 엄청난 속도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도둑맞은 건망고 추웠던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샤브샤브집에서 지인을 만났다. 매서운 추위를 녹여줄 국물을 오손도손 한국자씩 각자의 그릇에 덜어주며 만나지 못했던 그간의 근황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명은 코타키나발루에, 한 명은 방콕에 다녀와 각자 각국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던 와중, 지인은 나에게 갑자기 건망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그의 건망고 썰을 축약하면 이렇다. 내가 너를 주려고 방콕에서 건망고를 사서 집에 뒀다 →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다 → 친구들이 너의 건망고를 먹겠다고 선언했다 → 나는 안된다고 말렸다 → 친구들은 건망고는 편의점에서도 판다 그러니 그걸로 대체해라 우리는 이걸 꼭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 건망고는 그렇게 그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애석하게도 그렇게 나의 건망고는 역사..
[뉴욕 2화] 버스와 센트럴파크에서의 사람 관찰기 뉴욕으로 도망친 지 이틀째 되는 날, 센트럴 파크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뉴저지로 맨해튼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 했고 맨해튼 까지는 버스로 약 30여분이 소요된다. 전날은 비가 그렇게나 하염없이 몰아치더니, 시치미를 뚝 뗀 햇살은 맨해튼 행 버스안으로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맨해튼까지 들어가는 30여분 내내 나는 햇살을 만끽하며 버스에 타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유심히 관찰했다. 어딜가는지 한껏 신이나 조잘거리며 타는 히스패닉계 아이들, 큰 헤드폰을 끼고 흥겹게 리듬을 타는 흑인 남성(왠지 모르게 힙합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인 걸까?),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기운 없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을 향해 가는 것 같은 아시아계 여성. ..
[성수동 이월로스터스] 코스타리카를 마시며 구원을 외치다 방문지점: 이월로스터스 성수점 (서울시 성동구 서울숲2길 46)마신커피: 코스타리카 코라손 데 헤수스 밀레니오 내추럴노트: 애플사이다, 시나몬, 레드커런트, 베리어느 추운 날, 점심을 먹고 서울숲 산책을 가려고 사무실을 나왔지만 생각보다 뼈를 때리는 추위가 덮쳐와 다시 기어 돌아갈까 하는 내적갈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친다고 이왕 나온 거 가까운 곳에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셔야 겠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추위를 뚫어낸 나의 노고가 허망하게도 당초 목적지였던 카페가 문을 닫았다.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보통 서울숲의 많은 가게들이 월요일엔 휴무다) 잠시 동공지진이 일어났지만 이곳은 카페가 차고 넘치는 서울숲이다. 어디든 발길을 돌리면 카페는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덜 억..
[뉴욕 1 화] 도망지에서의 걷기와 폭풍우, 그리고 햇살이 내게 준 선물 뉴욕, 이름만 들어도 찬란한 도시다. 늘 나의 상상 속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뉴욕을 실제로 만나게 되는 날이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뉴욕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뉴욕으로의 ‘도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수많은 고민과 자괴감이 가득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연구년을 맞아 뉴욕 단기살이를 떠난 오래된 지인이 내 상황을 유심히 듣고는 나에게 말했다. “여기 와서 넓은 세상을 보고 느껴가라.”고.당시 눈치보고 따지고 할 기운이 단 이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회사에 거침없이 연차를 통보하고는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상상하며 ‘이제 난 자유다!’를 호기롭게 속으로 외치며 출발하였으나 예기치 못하게 비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