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있는 최초의 관람 작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엄마와 나, 그리고 내 친구의 어머니와 내 친구 이렇게 4명이서 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라는 어린이 뮤지컬인데 당시 인기 최정상이었던 젝스키스와 가수 진주가 출연했다. 그 뒤로 뮤지컬에 모종의 흥미를 느꼈는지 사운드 오브 뮤직, 오페라의 유령, 레베카, 알타보이즈, 저지보이즈, 지킬앤하이드, 맘마미아 등 여러 뮤지컬을 실제로 극장에서 봤고, 물랑루즈, 시카고, 라라랜드, 레미제라블, 위대한 쇼맨, 미녀와 야수, 알라딘, 메리포핀스 등의 작품은 영화로 보게 됐다.
하지만 뮤지컬 하면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하면 뮤지컬 아닌가. 이렇게 많은 작품을 봤지만 모두 한국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제대로 못 알아듣는다 할지라도 생애 꼭 한번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고 싶단 마음을 예전부터 품고 있었는데, 결국 내 바람대로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게되는 날이 왔다.
사실 나의 뉴욕 여정에 뮤지컬 관람은 계획에 없었다. 급하게 결정된 뉴욕 행 발걸음이라 뮤지컬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나의 보배로운 지인께서 넣어두신 뮤지컬 로터리가 당첨되는 복이 나를 찾아왔다. 게다가 배우들 이목구비가 다 보이는 앞자리다. 사실 뉴욕으로 떠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내가 도대체 뭘 그리 잘못 살았기에 재수가 이리 지지리도 없나 싶었다. 하지만 지난 내 과거는 뉴욕으로 오기 위한 찰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 도착한 뉴욕은 온 힘을 다해 너는 복을 타고난 행운아라고, 너의 앞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빛나며 너의 곁엔 소중한 사람들이 늘 함께할 것이라 말해주는 듯했다.
이날 내가 관람한 뮤지컬 <MJ the Musical>은 브로드웨이의 닐 사이먼 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으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작품은 연극 <폐허>와 <스웨트>로 두 차례나 퓰리처상을 수상한 린 노티지가 극본을 쓰고 런던 로열 발레단과 뉴욕 시티 발레단의 안무가를 거쳐 2015년 <파리의 미국인>으로 토니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월든이 안무와 연출을 맡았다.


마이클 잭슨은 1962년 형제들과 함께 잭슨5로 데뷔해 2009년 생을 달리할 때 까지 대중음악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팝의 제왕이다. 이 뮤지컬은 그의 역사 속 1992년 Dangerous 월드 투어 준비 과정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후까지의 음악적 여정을 다룬다. 어린시절, Jackson 5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로 성장하기 까지 그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그린 게 아닌, 플래시백 형태로 시간 순서가 마구 왔다갔다 함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와 그의 노래가 절묘하게 다 맞아 떨어지는 구성을 보고 있자 하면 감탄을 멈출 수 없다. 그 거친 춤을 추면서도 일말의 흐트러짐 없는 배우의 호흡과 가창력, 마이클 잭슨을 정말 죽어라 연구한 듯한 가창법, 손짓과 춤선(문워킹 짱),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의상 등의 소품 디테일도 뮤지컬을 빛내는 주요 포인트다.
뮤지컬이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는 뮤지컬 넘버가 바로 그 유명한 Beat it 인데, 도입부의 기타 연주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머리를 한 대 쾅 얻어맞은 전율이 올랐다. 내가 그의 음악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Beat it 도입부 10초 만에 그간의 고생을 한번에 보상받았다 생각한다. Beat it 을 시작으로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은 끊임 없이 극장을 채운다. I’ll Be There,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Wanna Be Startin’ Somethin’, Earth Song, They Don’t Care About Us, Billie Jean, Smooth Criminal, Thriller 등 명곡 주크박스는 잠시라도 쉴 틈이 없었고, 내 흥겨움도 지칠 새가 없었다.


뮤지컬 속으로 그렇게 빨려들어갔더니 어느새 커튼콜이었다. 닐 사이먼 극장을 나와 다음 장소로 향하기 위해 타임스퀘어를 걸었다. 걷는 동안 내가 보고 경험한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닌 듯했고 마냥 환상 같았다.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서울에서 난 이미 죽었고 그냥 영혼이 뉴욕을 떠도는 건가? 드디어 사후세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만나 본 건가?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곳은 정확히 어디지? 죽음과 환상에 대한 생각들이 머리를 뒤덮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난 아직 죽지 않았으며 내 두 발은 확실히 맨해튼 한 가운데를 밟고 있었다는 것이다.
살면서 때로는 상처에 깊이 패이기도 하며 모든 걸 집어치우고 단념하고 싶은 날들도 부지기수로 찾아온다.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좌절하고 나 자신을 무기력과 죽음 속으로 집어넣기엔 세상은 무궁무진 하고 새롭게 맞아들일 행복도 많다. 무엇보다 나는 행운아다. 내게 온 행운의 손을 잡고 뉴욕에 와서 말로 표현하기 벅찬 감동과 행복을 찾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과거의 쓰레기 같은 일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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