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으로부터의 사색/미국, 뉴욕 (2024)

[뉴욕 4화] 동시성 운명과 파르페 (세렌디피티3 카페 앞에서)

프로노이아 2025. 2. 8. 18:00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구경하고 나와 커피도 한잔 마시고 거리 구경도 할 겸 어퍼이스트 사이드 쪽으로 향했다. 두리번두리번 뉴욕을 배회하며 최대한 곳곳을 마주하려 했고, 마치 그간 봤던 뉴욕 배경의 영화 한 장면 속 주인공으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뉴욕을 천천히 내 안으로 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어퍼이스트에서 꽤 많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내 근처에 세렌디피티3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누구에게나 다시 돌려보고 싶은 영화가 있듯 나에게도 그러한 영화들이 몇 개가 있다. 특히나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보고 또 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시절 처음 봤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항상 언젠가 뉴욕에 가면 영화의 제목이자 배경이되는 세렌디피티라는 카페에 꼭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블루밍데일스(백화점)를 지나 조금 더 걸었더니 마침내 세렌디피티3 카페가 나왔다. 20여년간의 소망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니 감회가 새로웠다.

세렌디피티3 앞

주인공 두 남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블루밍데일스에서 서로의 애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 하필 같은 물건(장갑)을 동시에 잡게 된다. 그 인연으로 둘은 세렌디피티3 카페에 앉아 파르페를 같이 먹게 되고 이런 맛집을 어떻게 알게 됐냐는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름 때문에요. 발음도 예쁘고 ‘우연한 행운’이란 뜻이 좋아서요. 사실 우연보다는 운명을 믿지만요.” 그러자 남자는 “운명이 결정한다? 그럼 우리 의지는 소용없고요?”라고 되묻고, 그의 말에 여자는 다시 이렇게 답한다. “결정하는 건 우리지만 운명이 보내는 계시를 잘 읽어야 행복을 찾죠.”

"동시성 운명이란?"

첫 직장상사가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본인 책상 한 켠에서 책을 한권 스윽 꺼내어 한번 읽어보라 건네준 책이 있다. 그 책에서는 ‘동시성 운명’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이를 짧게 말하자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우연의 일치와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며 살아갈 때 무한한 가능성의 장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행운은 하나의 기회이며 내가 민감하게 알아차려야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주인공의 말은 결국 동시성 운명의 개념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운명이 보내는 계시는 우연으로 찾아오고 그 우연을 내가 잘 알아차려야 나에게 찾아온 기회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으로 떠나란 운명의 메시지를 붙잡은 나"

뉴욕에 내가 가게 된 것도 여러 개의 우연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어릴 적 부터 주구장창 보던 많은 영화(세렌디피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비긴 어게인 등)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탓에 늘 뉴욕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 다 내던지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싶은 시기 였던 것, 없던 시간이 갑자기 생겨버린 것, 당시의 심경을 토로할 수 있던 단 한 명의 지인이 마침 그 시기에 단기살이로 뉴욕에 거주해 나를 불러준 것, 평소 일절 관심 없어 뵈지도 않는 ‘오늘의 운세’ 기사가 그날 아침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것, 때마침 당시 그 무렵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였는지라 그래 어디 뭐라고 하나 들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클릭하게 된 것, 눌렀더니 나에게 한다는 소리가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사방팔방에 운이 열렸다.” 였던 것. 이 각기의 우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해 뉴욕에 갈 구체적 계획이 단 1도 없던 나를 세렌디피티3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난 2024년에 뉴욕에 갈 운명이었고 이 운명은 나에게 계속 우연이란 매개를 통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이 메시지에 반응했고, 메시지가 말하는 바를 내 의지로 정말 실행했다. 덕분에 난 분에 넘치는 추억과 경험을 쌓았고 뉴욕행은 단언컨대 내 2024년 최고의 선택이라 말할 수 있게 됐다.

내 안에서는 우연, 인연, 운명 그리고 필연에 대한 생각들이 삶의 시기별로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과거의 한때는 운명론자처럼 사람에게 이미 운명이란 게 있다면 굳이 노력해서 살 이유가 있는가, 내가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발버둥을 쳐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운명론적 사고 보다는 동시성 운명을 중요시 생각한다. 즉, 내게 일어나는 각종 우연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알아채기 위해서는, 그리고 필연적 우연과 행운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자체적인 노력과 의식이 필요하다 믿는 바다. 그리고 이것이 곧 내 운명으로 귀결된다 믿는다.

"우연과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나를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골프 중계를 보다 보면 종종 칩인버디, 샷이글, 홀인원 등의 엄청난 우연과 행운의 장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만 치부하면 프로들에게 다소 무례한 행위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는 필연의 결과다. 물론 선수들에게 8번홀에서의 홀인원이 필연은 아니다. 사실 의도했던 구질이 아니었는데 찰나에 미묘하게 불어준 바람 덕분에 홀 컵에 공이 그대로 빨려 들어갔을 수도 있다. 반대로 정확한 탄도와 거리를 구사한 샷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공이 생각보다 뒤틀려 갈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들은 현실이 많은 우연에 좌우된다 할지라도 결코 노력과 준비를 허투루 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음(예: 우천, 바람, 부상, 비매너 갤러리의 방해 등)을 알면서도 하루에 수백, 수천개의 볼을 쳐대며 손에 굳은살이 가득 배도록 샷을 연마한다. 그리곤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잔디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채를 휘두른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본인을 세상에 내던지는 강인함이 결국 우연과 행운의 필연을 맞이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로리 매킬로이의 엄청난 덩크샷>


"앞으로도 우연과 운명을 잡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계속된다."

세렌디피티3 앞에서 ‘여기가 정말 내가 20여년을 봐온 영화 속 거긴가?’ 하는 생각에 한참을 건물 밖에서 혼자 서성였다. 현실인데 현실감이 없는 상태에서 대문과 말없이 대치하고 있는 나를 지나가던 뉴욕인들이 이상하게 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친다. 하지만 이내 현실감을 되찾고는 문을 열어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가게 내부는 영화 보다는 살짝 조명 톤이 침침하게 느껴졌지만 생일파티를 하고 있는 단체 손님들,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친구, 연인들로 가득했고 사랑과 웃음이 넘실거렸다. 시간도 없고 자리도 없었던 탓에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먹는 파르페는 먹지 못했다. 이날 나에게 파르페는 허락되지 않은 운명이었다.

영화 속 두 남녀는 첫 만남 이후 서로 연락처도 모른 채 헤어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각자 약혼자를 옆에 두지만 서로를 잊지 못해 직접 찾아 나선다. 고된 노력에 절망하곤 찾기를 포기했다가도 포기하지 않고 우연한 단서들을 끊임없이 추적해 결국 몇 년을 돌고 돌아 재회에 성공한다. 일 그리고 우정과 사랑을 맞이하는 과정속에 우연한 행복의 단서들을 마주했지만 노력 없이 포기를 일삼은 난 그동안 상당히 많은 것을 놓쳤을 테다. 하지만 난 여전히 삶의 여정에 있고 아직도 많은 세렌디피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난 우연과 단서의 계시를 포착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자세로 내 운명을 담대히 맞이해 나가겠다. 그리고 다음 뉴욕 방문에서는 이번에 놓친 스윗한 파르페의 운명을 창조해 내겠다.

가게 안 기념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