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성수동 에이치커피로스터스] 커피 본연에 충실한 카페에서 세상 온화한 에티오피아를 발견하다

프로노이아 2025. 1. 31. 10:00
  • 방문지점: 에이치커피로스터스 성수(서울 성동구 성수일로11길 10 1층)
  • 마신커피: 과테말라 우에우에테낭고 디카페인 (노트: 라임, 오렌지, 블랙티, 초콜렛)
  • 구입원두: 에티오피아 게샤 카르마치 내추럴 (노트: 장미, 라즈베리, 파파야, 꿀)

직장생활에서 찾는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보물 같은 카페를 탐색하고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다. 이걸 노리고 입사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세상 핫하다는 성수동에 근무하게 됐고 그 덕에 좋아하는 스페셜티 커피를 꽤나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행복을 맛보게 됐다. 운명이라는 게 이런걸까, 내 선택의 결과물들이 하나둘씩 모여 또다른 선택지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그 선택은 또 다른 여정의 시초가 되는 것. 이러한 상황이 무한반복되며 엄청난 속도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마치 워터 슬라이드로 빨려 들어가 겨우 슬라이드 밖을 나왔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에 누워있는 것. 여기가 종착지 인지 알았더니 또다른 워터 슬라이드가 기다리고 있는 것. 다시 이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니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 이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풍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것.

이번 성수동 카페 픽은 에이치커피로스터스(H Coffee Roasters)다. 우선 이름이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H라는 알파벳을 좋아하고 즐겨 쓰기 때문인데 이는 나의 이름에 H가 들어가기 때문이다(그것도 두번이나!). 조금 안쪽에 있어 골목을 누비고 들어가면 하얗고 심플한 외관이 보인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요란한 소품 하나 없이 굉장히 심플하다. 디저트도 없다. 그저 커피, 사람, 그리고 좌석만 있을 뿐이다. 커피 본연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사장님의 의지가 느껴진 달까. 이러한 카페를 만나면 내가 좋아하는 커피에만 온전히 집중해주는, 나의 목적에 충실해 주는 주인장과 한 배를 탄 기분이다.

카페 입구
카페 내부 1
카페 내부 2
메뉴판
계산대

우선 원두를 탐색해 봤다.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블렌드 원두부터 과테말라 게이샤, 콜롬비아 언에어로빅, 에티오피아, 케냐, 브라질 등등. 세상 심각하게 원두를 고르고 있는 나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보통 어떤 스타일의 원두를 좋아하세요?’ 라며 친절하게 물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설명하자 직원은 나에게 에티오피아 게샤 카르마치 내추럴을 권했다. 사실 콜롬비아를 사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원두를 추천해 주는 이유에 대해서 세심하게 설명해 주는 직원분을 믿고 에티오피아를 골랐다.

원두를 고르는 내 레이더 망에 과테말라 디카페인 원두가 걸렸들었다. 흡족한 디카페인 커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는 직원에게 원두를 라이트하게 볶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쁜 마음에 우선 한잔 마셔보고 괜찮으면 나중에 원두 한 봉을 통째로 사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에티오피아 원두와 함께 결제했다.

원두 진열장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매장에 있던 한 손님이 데려온 강아지를 구경했다. 강아지를 오래 키웠던 탓인지 강아지를 보면 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후 내가 키웠던 솔이와 비교를 하게 된다. 이 친구는 그녀와는 달리 굉장히 순하고 사교성이 좋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짖거나 이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낯선 이와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가끔은 사람이 강아지와 놀아주는 것이 아닌 강아지가 사람과 놀아주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다. 맑고 한없이 순수한 이 생명체들은 온갖 추악한 진실, 탐욕과 욕망, 양면성을 감춘 인간이란 존재에 크리스탈 결정체 같은 투명한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줄로 장난치는 강아지

귀여운 그 녀석은 내 주문이 나오기 전 주인과 떠났고, 잠시 지루해질까 싶은 타이밍에 원두와 디카페인 커피가 나왔다. 커피 봉다리를 손목에 걸고 카페를 나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기대와는 살짝 다른 약간의 산미와 함께 고구마 노트가 느껴졌다고 해야하나. 구황작물 맛이 나는 커피들이 있는데 이 원두가 그랬다. 하지만 나는 구황작물 노트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에 디카페인 원두는 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디카페인 커피 한잔과 같이 구매한 에티오피아 원두는 에티오피아만이 내뿜는 향미를 아주 은은하게, 하지만 존재감 있게 내뿜었다.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게 입안에서 감도는 이 에티오피아를 마시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도, 사랑도 모두 소란스럽지 않게, 온유하지만 쉬이 흐트러지지 않는 형태로 나에게 다가와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과테말라 디카페인
구매한 에티오피아 카르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