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또 짐을 싸고 있는가?'에 대한 고찰
세어보니 오늘 날짜 기준으로 총 23개국을 탐험했다. 물론 대개 일정이 짧았던 탓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잠시 발만 담구어봤다 할 수 있을 것이나, 그간 다녀본 경험으로는 여행은 대개 이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
귀찮음 → 동기 → 기대와 호기심 → 상상과 실제의 간극 속 희열 → 아쉬움 → 허탈감
1. 귀찮음(혹은 무력화)
제일 극복하기 어려운 마의 1구간이다. 현실은 갑갑하고 떠나고는 싶지만 막상 이것저것 알아보고 구체적인 일정을 짜려 생각하니 아찔하다. 또한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지 하는 생각으로 나의 떠나지 않음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여행의 의미를 무력화시킨다.
2. 동기
1구간에서 무언가가 확 마음에 불을 지른다. 누군가가 나에게 함께 가자며 들쑤시던지 아니면 질식할 것 같은 나날들이 나를 옥죄든지. 그러면 이내 나의 두뇌 그리고 신용카드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3. 기대와 호기심
여행 계획의 완성, 짐싸기, 공항 도착까지의 구간이다. 무엇을 볼 지, 어떤 것을 먹어볼지, 잠은 어디서 잘지 동선과 시간을 모두 고려하여 여행을 계획한다. 정보를 찾아보며 랜선 사전 답사를 시작하는 나는 실제 이것들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고취된다. 캐리어엔 옷을 최소화시켜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한다. 그래야 돌아올 때 하나라도 더 담아올 수 있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 –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서부터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호 관계성에서부터 여행을 로맨틱하게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 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 공항에서 일주일을(알랭드보통, 청미래, 정영목 옮김)
공항 출발장은 여행지에 대한 꿈이 현실로 바뀌는 곳이다. 보안 검색 구간이 다소 귀찮기는 해도 내가 공항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내가 공항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바로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화면이다(구체적인 명칭은 잘 모른다). 런던, 뉴욕, 방콕, 시드니, 베이징. 내가 가는 곳도 아니면서 항상 유심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그 짧은 찰나에 내 매력적인 여행지를 잠시 잊은 채 그 도시들을 상상한다.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면 이런 느낌일까?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밀스러운 존재에 호기심이 충만해지는 그런 느낌.
4. 상상과 실제의 간극에서 오는 희열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파악하는 구간이다. 상상했던 것들이 실제론 구차하고 피곤할 수도, 반면에 더욱 근사할 수도 있다. 여행은 뜻밖의 사태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에서 유레일 열차를 타고 창밖너머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고궁같이 생긴 호텔에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실제론 노조 파업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되며 열차를 갈아타야 할 도시에서 뜻밖의 1박을 하는,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도 모르는, 곧 유령이 출몰할 것 같은 이름모를 어두컴컴한 곳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끌고 가는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실제 유럽여행시 겪은 일이다.)
하지만 내 경험의 한계로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는 기쁨도 있다. 가령 이게 정말 이세상인가? 싶은 파노라마 뷰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십자군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하고자 피신했을 법한 산골자기 조그만 마을의 정취를 느끼는 순간, 그곳에 있는 지도 몰랐던 세계적 명화를 미술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는 느낀 경이로움 등.
그 밖에도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음식의 맛과 특이한 향신료들, 그간 봐 본 적이 없는 특이한 혹은 형형색색의 건축물들, 조각상이 예쁘게 설치되어 있는 넓은 광장과 공원들. 그 속에서 자유롭게 누워 책을 읽거나, 샌드위치를 먹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외국인들. 이런 세상 이국적인 경험은 너무나도 근사하게 나의 오감을 일깨운다. 알랭드보통은 이국적인 것을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알랭드보통의 말처럼 내가 이국적이라 느끼는 것은 한국에 가지고 있는 나의 불만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무채색의 천편일률적으로 생긴 건물들,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관의 상업 간판들, 숨 한번 크게 들이키고 내쉴 수 있는 녹색 공간의 부재와 같은 것들. 뭐가 어찌되었든 상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재밌는 일이다. 간극이 크다면 그만큼 내 뇌리에 박히는 추억이 커지는 것이고, 작다면 내 상상이 맞은 것이니까.
5. 아쉬움
여행이 반환점을 돌아 귀국을 향해 흘러가면 슬슬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다가 여행 마지막 날 밤엔 울고 싶은 지경에 이른다. 하루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마음과 나의 현실로 돌아가야하는 먹먹함이 동시에 물밀 듯 밀려온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과 내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결코 피할 수가 없다.
6. 허탈감(혹은 허무주의)
귀국편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탄다. 창밖을 내다보면 서울은 나에게 무심하고 퉁명스럽기만 하다. 그 어떤 환대도, 변화도 없다. 그저 예전과 똑같이 무채색의 고층 빌딩만이 나를 내리깔고 바라본다. 불과 몇일 전만 해도 풍요롭게 가지고 있던 반짝이는 시선들은 다 신기루였던가. 그렇게 허탈함 혹은 허무주의에 휩싸인 채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반복되는 일상과 스트레스에 지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만사 귀찮아 침대에 눕는다. 이렇게 다시 1구간이 시작된다.
이 패턴의 숱한 반복속에서 계속하여 짐을 싸는 이유는 여행이 내 삶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지탱해 주고 새로운 것을 켜켜이 쌓아주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는 나의 고질병인 무심함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서울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마트나 편의점, 식당의 메뉴판, 식당에서 내오는 그릇마저 나는 감탄하며 연신 사진을 찍고 불현듯 떠오른 느낌을 적어댄다.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마법 아래 나는 내 안에 없던 새로운 관점과 감정을 가지게 된다. 여행지에서는 그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과 생각의 장이 펼쳐진다. 그것이 자꾸 나를 떠나게 만드는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