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의 단상

숫자 너, 자세히 보니 매력적이다

프로노이아 2024. 11. 17. 08:57

나는 학창시절 내내 숫자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수학 시험 내내 내가 답으로 써낸 숫자들은 참 많이도 틀렸고, 왜 틀렸지 알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은 가야하니 수포자로 살지 않는 정도의 수준에서 겨우 성적을 틀어막으며 입시를 준비했고, 인문대에 입학한 나는 이제 숫자와 영원한 안녕을 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 인생은 한치 앞도 모르는 것, 숫자는 스믈스믈 다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지금 숫자로 일하고, 숫자로 성과를 말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산다.

나의 일은 대충 이렇다. 신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가며, 향후 매출은 얼마, 영업이익은 얼마가 나오며 이로 인한 현금흐름은 얼마, 그리고 몇 년 안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해 투입한 비용을 모두 회수할 수 있을 지를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투자처(펀드, 채권, 주식, 메자닌 등)를 물색해 투자를 진행하고, 이 투자를 통해 얼마의 수익을 남겼는지가 내 성과다. 끊임없는 숫자 연속인 삶이다.

출처: Investopedia

 

어릴 적에는 숫자는 그저 골치아픈 것, 머리아픈 것이라는 개념이 깊게 박혀 있었던 듯하다. (물론 지금이라고 아예 안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고 이내 고귀함과 숭고함까지 느끼게 된다.

아래 목록들은 나와 관련있는 숫자들이며, 그 숫자에 담겨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 1,250,233. 내가 지향하는 삶과 연결된 소비의 결과로 카드사가 이번 달 나에게 청구한 금액(원)이다.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게 내 삶의 지지대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나에 대한 투자에 충실한 결과다.
  • 13,126. 이번 달 내가 운동으로 총 소비한 칼로리(kcal)다. 살기 위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무아지경으로 힘껏 내달리는 나의 땀이 담긴 숫자다.
  • 3. 현재까지 내가 다녀본 회사의 숫자다. 3이라는 숫자는 작아보이지만 이 3이라는 숫자 속엔 커리어 성장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며 수십번의 원서 접수와 서류 광탈, 면접 등을 경험한 내가 있다.
  • 7.4. 우리 회사의 이번 상반기 영업이익률(%)이다. 누군가가 보면 ‘겨우?’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7.4%라는 숫자 안에는 고객에게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되 뇌이는, 쉴 틈 없이 운전하며 전국 각지로 영업을 다니는 모든 직원들의 노력과 땀이 담겨있다.
  • 135. 내가 올해 비행기 왕복으로만 보낸 시간이다. 여권에 불 날 만큼 올해 유독 많았던 해외 출장 덕분이다. 이 135시간을 통해 다채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식문화, 새로운 시야 등 내 오감을 일깨우는 다양한 경험이 생겨났다.

한편 숫자는 굉장히 매력적인 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온갖 나의 구구절절함을 단 한번에 설명해 주는 표현 도구이기 때문이다. 말을 평소 굉장히 아껴 하는 나에게 이만한 소통 도구가 없는 듯하다. 때로는 숫자만 말하면 모든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졌으면 좋겠다.

<Case 1. 상사와의 대화>

  • (상사) “저번에 검토 요청한 투자 건은 의견이 어때요?”
  • (나) “1,975(업황 흐름을 봤을 때 향후 업사이드가 크게 없어 보이는데, 현재 시점으로 너무 고평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Case 2. 친구와의 대화>

  • (친구) “우리 남편 친구인데 소개 한 번 받아볼래?”
  • (나) “89(운동을 좋아하고 배려심 있고 관대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참, 먹는 것도 가리는 것 없이 뭐든 복스럽게 잘 먹는 사람이면 좋겠다 야)”

물론 이렇게 대답하면 머지않아 회사에서 곧 짤리겠고, 친구에게 절교 당하겠지만.

무쪼록 삶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숫자와는 가급적 멀어지고 싶어 했던 내가 이제는 숫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게다가 숫자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다니. 이런 게 곧 삶의 묘미이기도 하겠다. 언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것. 그리고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

나는 숫자와 더 친해지고 싶어 노력하는 중이다. 보고서에도 일부러 더 수치를 넣어보기도 하고, 단위가 커지면 로그를 씌워 다시 그래프를 그려 보기도 하면서. 녀석이 워낙 예민해서 0.00001만 계산이 틀려도 완전히 틀린 게 되어버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숫자가 가진 오묘함과 매력에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