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의 단상

어그로꾼으로의 도약 다짐

프로노이아 2024. 10. 12. 15:03

사람은 누구나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화된 우리는 공손한 모습과 교양있는 태도를 통해 그 공격성을 감추고 있다. 나 역시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조상들의 말씀에 따라 각종 상황에서도 공격적 태도를 감추려 하지만, 가끔은 나도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3kg의 귀여운 체구로 꽤나 담대하게 공격을 감행했던 ‘솔’이가 떠오른다.

약 10년 전 무지개 다리를 건넌 나의 17년 지기 ‘솔’ 그녀는 절대 참지 않는 앙증맞은 말티즈였다. 뜯고 있던 개껌을 빼앗아가려는 작은 액션을 취하기만 해도 그녀는 ‘가져가면 넌 죽는다’ 라는 표현으로 거침없이 이를 드러냈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나의 엄마 이여사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을 때, 내가 이여사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그녀는 또 다시 이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우리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집에 강아지를 두려워하는 손님이 오면 잠시 방 안에 격리시켜 두었는데, 그때도 역시 그녀는 방문을 벅벅 긁고 우렁차게 짖으며 참지 않았다. ‘밖에 저 수상한 인간은 누구냐! 내가 직접 만나봐야 겠으니 날 꺼내라 주인’.

먹을 것을 요구하는 눈빛을 발사하는 그녀

하지만 인간은 짐승과 달리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매번 이를 드러내며 큰 소리로 고함치고 역정을 낼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행동은 쉽사리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분노조절장애 같은 정신과적 질병이 있거나 반사회적 인간일 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포장해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가령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교묘한 말로 상대를 내리 깔거나, 가스라이팅을 하거나, 혹은 웃는 낯으로 아닌 척 뒤에서는 온갖 모사로 상대를 집단에서 고립시키거나.

사회화된 인간이자 전형적인 I형 인간인 나는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로 큰소리 치며 말한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화를 내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의 내향적인 성격과 맞물려 성인이 되며 점차 스스로 감정을 짓눌러 버린 탓에 화를 내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나의 억눌린 공격성을 운동으로 표출한다. 내 안에 쌓인 홧병을 중력을 거스르는 웨이트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만큼의 달리기로 다스리는 것이다. 조금 더 세련되고 차분한 방식으로 공격성을 표출한다면 혼자 글 속에 소심하게 나마 울화를 담아보는 것이 전부다. 그나마도 그 울화는 매우 추상적이고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난 어릴 적 꽤나 당돌하고 거침없으며 공격적인 아이였다. 나의 엄마 이여사에게는 말대꾸를 많이 해 한번 혼나고 말 일을 두 번 세 번으로 키웠다. 중학생 때는 하지 말라고 해도 똑같은 장난을 계속치는 같은 반 남학생 면상에 포크를 집어 던졌다. 음악 페스티벌은 너무 가고 싶은데 같이 간다는 친구가 없어 나 홀로 페스티벌에 가서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깨 동무를 하고 떼창을 했다. 호주에 잠시 머무를 땐, 겁도 없이 20대 여자 혼자서 배낭 하나 들쳐 매고 캔버라, 퍼스, 아들레이드 등 각지를 돌아다녔다. 학부 시절엔 같은 수업 듣던 남학생에게 접근해 캔커피도 주고 번호도 따봤다.

하지만 30대의 난 그저 논쟁에 침묵하게 됐고, 무언가를 하려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엄두가 안나 시작조차 안 하게 됐고, 어딘가를 가고 싶다 가도 그냥 눕게 됐고,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도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감정을 찍어 누르게 됐다. 그 옛날 공격적인 소녀는 어디 가고 이도 저도 못하는, 화도 못내는 이런 겁쟁이로 남아버렸나.

살면서 여러 좌절과 실패를 겪고 나서 의기소침해진걸까, 아니면 어른이라면 모든 걸 억누르고 참아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출 에너지와 욕망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내보이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격성과 욕망을 억누른다고, 고상하게 ‘전 화도 안 내고 욕심도 안내는 착한 아이에요’라고 보여주는 게 과연 더 어른스러운 모습인 걸까? 오히려 내 꿈과 소망, 그리고 나를 더 희미하게 만드는 찌질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저자 로버트 그린은 인간은 특유의 강력한 에너지를 타고났는데 이를 적극성, 의지력, 이를 한층 더 나아가 공격성으로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 에너지는 적절히 분출을 시켜야 하는데 잘못 분출시키면 부정적 결과를 낳지만, 적절히 분출시키면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목적에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나는 내 특유의 에너지를, 잠재되어 있는 공격성을 그저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어린 시절의 적극성, 공격력은 그렇게 메말라 버렸고, 나는 지금 이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나도 (예의는 갖춘)어그로를 조금씩 끌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 어그로는 겁 없이 용감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무언가를 성취하는 원동력으로 삼겠다. 무언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 부당하다고, 화가 나면 이러저러해서 화가 났다고, 하고 싶은 건 하고 싶다고,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겠다. 원하는 혹은 원치 않는 바가 있으면 확실히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카리스마 있는 눈빛을 뿜어냈던 작지만 대담했던 그녀 처럼.